철거를 앞둔 동네 목욕탕의 마지막 영업일에 나는 카운터 서랍을 비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십오 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손님들에게 사물함 열쇠를 건넸다. 서랍 맨 아래에서 모서리가 둥글게 닳은 작은 공책이 나왔다. 표지에는 ‘외상’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첫 장에는 돈 대신 사람의 이름과 짧은 문장이 줄지어 있었다. ‘김복례—비 오는 날 우산 하나’, ‘103호 할머니—보일러 고장 난 날 두 시간’, ‘중학생 형제—시험 끝나고 갚음.’
“이건 아직 못 받은 돈이야?” 내가 묻자 어머니는 공책을 덮으려 했다. “받은 것도 있고, 안 받은 것도 있지.” 목욕탕을 넘겨받을 건물주는 미납액을 계산해 보상 요구에 넣자며 공책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페이지마다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진 곳을 가리켰다. 현금으로 갚은 기록인 줄 알았는데, 어떤 동그라미 옆에는 ‘겨울 김치’, ‘병원 동행’, ‘새벽에 수도 잠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103호 할머니의 아들이 들어왔다. 그는 어머니에게 낡은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어머니가 예전에 할머니에게 맡겨 두었던 옥상 창고 열쇠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돌려드리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열쇠에는 누렇게 바랜 고무줄이 감겨 있었다. 어머니는 열쇠를 받지 않고 그의 손을 공책의 빈 페이지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여긴 없어지니까, 열쇠도 갈 데가 없네요.”
사람들이 모두 나간 뒤 나는 공책의 금액을 계산하려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러나 우산 한 개와 병원에 함께 간 두 시간을 같은 칸에 넣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탕의 물을 빼고, 김이 사라진 거울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거울 속에는 처음으로 텅 빈 목욕탕이 끝까지 비쳤다. 어머니는 공책에서 사용하지 않은 뒷장들을 조심스럽게 뜯어 내 새 주인에게 메모지로 주고, 이름이 적힌 앞부분은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가 장부를 남긴 것이 빚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어떤 방식으로 이 동네를 버텨 주었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였음을 알았다.